[이윤학의 삼코노미]시장의 마법으로 경제의 미래를 풀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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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아무갱 작성일25-06-07 10:02 조회0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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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필은 아무도 혼자 만들 수 없습니다. 나무는 캐나다에서, 흑연은 남미에서, 금속은 중국에서 왔을 수 있습니다. 누가 지시하지 않아도 시장은 이걸 만들어냅니다. 그것이 시장의 마법입니다.” 신자유주의의 이론적 배경을 제공한 밀턴 프리드먼의 말이다. 그는 시장에 대한 국가 개입을 극단적으로 배제하며, 경제 자유를 최상의 가치로 뒀다. 시장은 자율적으로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고 보았고, 정부는 작아야 하며, 기업은 오직 이윤만을 추구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프리드먼의 사상은 1980년대 레이건노믹스와 대처리즘의 설계도가 되었다. 그러나 그가 사망한 지 2년 후인 2008년 글로벌 금융위기가 발생하자 워싱턴포스트는 “프리드먼은 죽었고, 그와 함께 자유시장 신화도 무너졌다”고 논평했다.
현대 자본주의 이론에서 프리드먼과 가장 첨예한 대척점에 서 있는 사람은 토마 피케티이다. 그는 “시장에 맡기면 효율은 생길 수 있지만, 정의는 결코 생기지 않는다”고 주장한다. 피케티는 자본주의가 자동적으로 균형을 찾아가는 시스템이 아니며, 오히려 방치하면 불평등을 가속화한다고 경고한다. 그는 ‘자본수익률이 경제성장률보다 높을 때, 자산은 세습되고 사회는 계급화된다’는 역사적 분석을 통해, 조세와 자산 재분배, 그리고 자본의 민주화를 주장한다.
이 두 사람의 주장은 단순한 이론 싸움이 아니다. 신자유주의가 실제로 구현된 지난 40년 동안 그 후폭풍은 미국 사회 곳곳에 뚜렷한 상흔을 남겼다. 특히 주목할 것은 미국 노동자의 현실이다. 1970년 미국의 실질 국내총생산(GDP)은 약 5조3000억달러였다. 반세기 후인 2024년, 이 수치는 23조5000억달러를 넘었다. 그러나 미국 중위 노동자의 실질 주간임금은 1979년 340달러 수준에서 2025년 현재 373달러에 머무르고 있다. GDP는 4배 이상 성장했지만, 노동자의 체감소득은 사실상 제자리인 셈이다.
제조업도 마찬가지다. 미국 제조업 고용은 1979년 1960만명에서 2025년 1275만명으로 34% 감소했다. 제조업이 GDP에서 차지하는 비중도 1950년대 25%에서 현재 10% 수준으로 쪼그라들었다. 생산시설은 해외로 빠져나갔고, 미국 내 고용은 플랫폼 서비스나 비정규직으로 대체되었다.
이 과정에서 주목할 것은 주주환원 중심의 기업 지배구조다. 미국 대기업들은 지난 수십년간 자사주 매입과 배당금 지급에 열중했다. 2022년 S&P500 기업의 자사주 매입은 사상 최고 수준인 약 9227억달러로 그해 미국 전체 R&D 투자 8920억달러를 넘어섰다. 즉 혁신은 둔화되고 제조업 경쟁력은 저하될 수 있음을 시사하는 대목이다.
실제 IBM은 2000년 이후 12년간 1500억달러 이상을 자사주 매입과 배당금으로 지급하면서 클라우드 및 AI 분야에 대한 투자 부족으로 아마존, 구글 등 경쟁사에 비해 기술 전환에 뒤처졌다는 평가를 받았다. 2013년 이후 7년 동안 500억달러 이상을 자사주 매입과 배당금 지급으로 사용한 보잉은 시스템 결함이 드러난 737Max 사태로 항공기 품질과 안전성에 대한 투자가 상대적으로 부족했음을 보여주었다.
이러한 구조적 실패 앞에서 트럼프 대통령은 제조업을 살리겠다며 고율의 관세를 부과했다. 중국, 유럽, 한국, 멕시코 등 전방위적으로 수입품에 장벽을 세웠다. 그러나 미국 제조업의 쇠퇴는 단순히 수입 탓이 아니라, 내부 생태계가 무너진 결과다. 인력·기술·공급망이 붕괴된 상황에서 관세는 해법이 되지 못한다.
오히려 관세는 소비자물가를 상승시켜 저소득층의 삶을 더 어렵게 만든다. 산업 기반 없이 관세만 높이는 보호무역은 ‘속 빈 강정’에 불과하다. 이는 산업 재구성의 동력을 떨어뜨리고, 글로벌 공급망에서 미국의 신뢰도만 낮추는 결과를 가져올 것이다.
프리드먼이 그렸던 자유시장 모델은 신화로 끝났고, 피케티가 우려한 불평등은 현실이 되었다. 이제 우리는 단순한 규제나 세금이 아닌, 분배구조의 재설계와 장기적 기술 투자, 공공영역의 재정의를 고민해야 한다. 경제의 미래는 마법 같은 시장이 아닌, ‘책임 있는 설계’에 달려 있는지도 모른다.